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드로스 3세/생애 (문단 편집) === 원정의 끝과 사망 === 인도 원정에서 되돌아온 알렉산드로스는 수많은 관료들이 부정 축재를 한 것을 발견했다. 이 관료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성격을 볼 때 이토록 빨리 원정을 중단해 귀국할 줄은 예상 못 했고, 또한 그중에서도 많은 이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원정 도중 전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껏 부정 축재를 한 것인데 갑자기 돌아온 알렉산드로스에게 발각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들 대부분이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처형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수사]]로 돌아가 그를 따라 종군했던 마케도니아군에게 보상으로 많은 급료를 주고 그들의 빚을 모두 대신 갚아준 뒤 마케도니아로 귀국하라고 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마케도니아군이 인도에서 파업을 벌였을 때 내세운 표면적 명분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오해한 것으로, 사실 이들이 원한 것은 전쟁을 그만두고 싶은 것이었지 마케도니아로 가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들은 알렉산드로스 곁에 머물며 정복자로서의 혜택을 누리고 싶었지 얼마간의 퇴직금만 받고 마케도니아로 되돌아가 실업자 신세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병사들이 [[징집]]병이긴 했으나 이들이 엄연히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고향에 돌아가 일하는 것이 더 수익이 좋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 당시의 자체 무장 같은 것은 자신들이 해야 했기에 만일, 마케도니아로 돌아갔다 한들 정복자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잘 살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이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을 거부하며 오피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에게 직접 나아가 이들을 꾸짖고 몇몇 주동자를 처형하라고 지시했다([[오피스 연설]]). 그러자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밤에 알렉산드로스가 있는 막사를 포위한 뒤 동틀 때까지 목놓아 울었는데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계획을 철회하고 이들을 모두 용서한 뒤 이들 전원에게 자신의 '일족'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영예를 주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이들과 함께 주연을 즐겼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뒤 마케도니아인들의 반발이 자신의 친페르시아 행보 때문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마케도니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을 융화시키기 위해 그 두 인종간의 집단 혼인식을 치르게 했다. 이때 페르시아 여자와 결혼한 마케도니아 남자의 수는 무려 10,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도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이소스 전투 때 사로잡은 다리우스 3세의 큰 딸 스타테이라 2세와 결혼했다. 재미난 사실은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에 상당수는 이혼했다. 그러나 디아도코이 중 한 명인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는 이때 결혼한 아파마(박트리아 계통이라고 한다)와 이혼하지 않았고 후계자도 그녀와의 사이에서 본 [[안티오코스 1세|안티오코스]]로 지명했다. 이 덕분에 훗날 셀레우코스가 옛 바빌로니아 지역을 터전으로 삼고 [[안티고노스 1세]]를 칠 때 페르시아 기병대를 동원하는 등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반란을 진압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병사 중 고령이거나 부상을 입어 전투에 부적합한 14,500명을 선별해 마케도니아 제일의 명장으로 병사들의 인기가 대단했던 [[크라테로스]]가 이들을 인솔해 마케도니아로 귀국하게 했고 크라테로스는 마케도니아 본국의 섭정을 맡았던 [[안티파트로스]]를 대신해 새로운 섭정이 되라고 명령했다. 이는 자신의 제국 통합 정책을 반대한 크라테로스를 치워버릴 의도였다고 볼 수도 있다.(어쨌든 모양새는 승진이었기에 크라테로스도 불평하지 않았다) 이들 중에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최정예 병력이었던 은방패 부대([[아르기라스피데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일평생을 함께 했던 오랜 친구이자 연인이자 심복이었던 [[헤파이스티온]]의 죽음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이로 인해 대단한 상실감과 좌절감에 빠졌으며, 그를 기리기 위한 거대한 기념물들을 짓기 시작했다. 더불어 헤파이스티온의 갑작스러운 급사 때 자리를 비운 담당 의사의 태만죄를 물어 [[십자가형|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이 부분은 좀 더 자세히 알아 두어야 하는데, 당시 헤파이스티온은 의사로부터 소화 불량 증세에 걸렸으니 당분간 술을 마시지 말고 음식을 조금만 먹으라고 권고를 받았다. 처음에 헤파이스티온은 그 말에 따랐으나 시간이 지나자 배가 고파서 닭 1마리를 삶아 먹고 거기에 [[포도주]] 항아리 1개까지 모두 비워버리며 마구 폭음, 폭식을 하는 바람에 소화 불량 증세가 심해져 죽고 말았다. 헌데 그 직전에 의사는 자기가 좋아하던 전차 경주 경기를 보러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이후 콧사이오이 부족을 정벌했을 때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그 부족의 청장년 장정들을 모조리 목 베어 학살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알렉산드로스도 쓰러졌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고작 32세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쓰러지기 전까지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젊었기 때문에 [[아라비아 반도]]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정확히는 [[아라비아]] 점령 후 바다를 통해서 [[아프리카]]를 돌아가 [[카르타고]]를 공격한다는 발상이었다.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Ἱστορίαι)에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네코 2세(Necho II)의 명을 받고 항해에 나선 [[페니키아|페니키아인]]들이 2년에 걸쳐서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대륙을 일주했다는 기록이 나와 선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가도 힘든데 정복까지 하면서 가는 길이면 고생길이 훤했을 것이다. 그리고 최종 목표는 [[지중해]] 정복이라는 것으로 보아 [[로마]] 진공이었다.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Diodorus)가 남긴 알렉산드로스의 기획에는 아버지 필리포스 2세의 무덤을 [[피라미드]]에 맞먹게 짓는 것, 동•서의 인류를 서로 맞바꾸는 민족 대이동을 동반한 통합 정책 등 흠좀무한 것들이 있었다고 한다.] 갑자기 쓰러진 것이었다. 쓰러지기 직전 알렉산드로스는 해군 제독이었던 네아르코스와 파티를 한 뒤 아침이 될 때까지 술을 퍼마셨었다. 그 뒤 알렉산드로스는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고열은 계속되었다. 1주일 후 알렉산드로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인간의 [[뇌]]는 열에 취약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고열에 시달리게 되면 뇌가 익어 뇌세포가 파괴된다.] 그 다음 날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알렉산드로스의 건강에 무엇인가 이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알렉산드로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 중 지위가 높은 몇 명만 만났는데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반기기 위해 간신히 손을 들어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이틀 뒤 알렉산드로스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에우메네스가 기록한 《왕의 일지》(Royal Journals)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독살]]의 징후는 없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사람을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독은 현대에도 드물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실려 있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이시우스 달 18일.[* 현재의 4월경.] >왕은 심한 열 때문에 목욕실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왕은 침실로 돌아와서 메디우스와 함께 주사위 놀이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날 저녁 왕은 목욕을 하고 신에게 제사를 드린 다음 저녁 식사를 했다. 그날 밤에도 열이 심했다. >20일. 평소와 같이 목욕을 하고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목욕탕에 누워 [[네아르코스]]의 항해담과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재미있게 들었다. >21일. 전날과 같은 하루를 보냈다. 다만 열이 심해져서 밤새도록 몹시 앓았다. 다음날은 열이 더욱 심해졌다. 왕은 부축을 받으면서 일어나 목욕통 옆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장군들과 의논을 하여 적당한 사람으로 군대에 생긴 결원을 보충하기로 했다. >24일. 병세가 더욱 나빠졌지만 왕은 일어나서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장군들은 곁을 떠나지 말고, 하급 장교들은 문 밖을 지키며 밤을 새우라고 명령했다. >25일. 강 건너편에 있는 궁궐로 자리를 옮긴 뒤 잠을 조금 잤으나 열은 내리지 않았다. 장군들이 침실에 들어갔을 때는 혼수 상태에 있었다. 다음 날도 같은 상태가 계속되었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왕이 돌아가신 줄 알고 모두 몰려와 소란을 일으키며 왕의 막료들을 협박하여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무장을 벗은 뒤 차례로 왕의 침상 곁을 지나며 쾌유를 빌었다. 같은 날 피톤과 셀레우코스를 세라피스의 신전으로 보내, 왕을 그곳으로 옮기는 것이 어떤지를 물었다. 그러나 옮기지 말라는 신탁이 내려왔다. >28일. 저녁에 마침내 왕께서 서거하셨다.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는데 일각에서는 암살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플루타르코스 당대에 알렉산드로스가 독살당했으며, 독살의 주체는 당시 마케도니아 섭정이었던 [[안티파트로스(마케도니아)|안티파트로스]]이지만 '''그 배후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다'''는 음모론이 돌아다녔던 모양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 [[칼리스테네스]]를 알렉산드로스가 처형한 데 대한 원한이 그 근거이다. 물론 플루타르코스가 참고했던 역사가들은 물론 플루타르코스 본인 역시 독살설 자체가 음모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독살당한 사체 치고는 독살당한 징후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인이 저술한 《영웅전》에서도 까마귀 두 마리가 싸우다가 알렉산드로스의 어깨에 부딪혀 떨어지는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고 기록했다.]을 제기하기도 하고, 너무 젊은 시절에 이룰 걸 다 이뤄서 의욕 상실로 병에 걸려 죽은 거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학설에서는 죽기 전에 포도주를 '''6.5리터가량(그것도 원액)'''을 들이켜 마셔서 사망했다고도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를 부정한다.] 헤파이스티온도 과음 때문에 죽었다는 설이 있다. 그 외에 열병을 빨리 치료하기 위해 독성이 강한 약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신빙성이 거의 없는 [[야사]]이긴 하지만, 어느 지역에서 그에게 여자를 진상했는데, 그 여자가 소위 말하는 독인(어릴 때부터 독을 먹여서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독살이 가능하다는 사람)이어서 그 여자를 안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 물론 이는 낭설에 불과하고, [[복상사]]나 [[성병]]으로 죽었다는 해석에 대해 설화가 붙은 것. 현대 학자들에게 제일 유력하게 받아들여지는 학설은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죽었다는 설이다. 말라리아는 혼수 상태와 구토와 심한 발열 증상을 나타내며, 특히 발열 증세가 일정한 주기로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역사 기록상의 알렉산드로스의 죽음 묘사와 일치한다. 발열 증세의 주기로 보아 알렉산드로스가 감염된 말라리아 원충은 P. ovale 혹은 P. vivax 가능성이 높다. 또한 열대 풍토병이 많은 인도 원정에서 귀환한 뒤에 사망한 점도 심증을 더한다. 알렉산드로스가 인도 원정 도중에 감염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말라리아가 가장 흔하게 감염되는 원인은 [[모기]]로 알렉산드로스는 이 때 [[모기]]에 물렸을 가능성이 높은데, 나이도 젊고 지병도 없고 몸에 아무 이상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고열로 쓰러지고 [[말라리아]]와 거의 비슷한 증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알렉산드로스의 사망 원인이 [[모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의 죽음에 대한 보고가 그리스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이 사실을 즉시 믿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4세]]는 알렉산드로스 사후에 태어났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의 동료들은 임종 때 그에게 왕국을 누구에게 물려주었느냐고 물었고, 그의 간결한 유언은 "가장 강한 자에게"였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이론은 그의 후계자들이 "tôi Kraterôi", 즉 그의 마케도니아 군대를 집으로 이끌고 귀환해 새로이 마케도니아 섭정을 맡게 된 장군인 "[[크라테로스]]에게"를 고의적으로 또는 실수로 잘못 들었다는 것이다.[* 이건 현대 역사가들의 주장인데, '가장 강한 자에게'는 고대 그리스어로 "tôi kratistôi" '크라테로스에게'는 고대 그리스어로 "tôi Kraterôi"라서 일리가 없는 가설은 아니다.] [[아리아노스]]와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이 시점에서 말문이 막혔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이것이 불분명한 이야기임을 암시한다. 디오도로스와 쿠르티우스, 그리고 쥐스탱은 알렉산더가 증인들 앞에서 통치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그의 [[도장(도구)#s-5.3|인장반지]]를 친위대장이자 엘리트 근위기병대([[헤타이로이]])의 최선임 대대장인 [[페르디카스]]에게 건네줬다는 더 그럴듯한 이야기를 했고, 그래서 그를 지명했다고 기술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